이때에 지식인들은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들이고 국가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권력가들이며,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새로움에 참여할 것인가, 절개를 지켜 잔류할 것인가의 선택 밖에 없었으며, 어느 쪽이든 내세울 명분은 있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두문동 이라는 단어를 추앙하게 만드는 뿌리가 되는 것이다.
고려 말에 고려왕조와 운명을 함께 하면서 잔류를 선택한 사람들을 우리는 두문동인(杜門洞人)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새로운 개혁세력에 대항하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기도 한다. 두문동인(杜門洞人)들이 몇 명이나 되는 지는 알 길이 없다.
흔히 세간에서는 72명이라고 확정된 숫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여러 기록을 (조선왕조실록) 참조하면 대략 50여명에서 117명 혹은 400여명(고려숭의 열전)을 거론하기도 한다.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서쪽과 만수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 건국(朝鮮建國)을 반대하고, 고려(高麗)의 신하로 남기를 맹세한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면서 고려의 신하들을 안무(按撫) 하기 위하여 과거장(科擧場)을 설치하였으나, 그들은 절개(節槪)를 지켜 과거장(科擧場)에 나가지 않고 개성의 북쪽 고개 마루에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걸어놓고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곳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후에 그들이 넘은 고개를 부조현(不朝峴), 조의관(朝衣冠)을 걸어 둔 곳을 괘관현(掛冠峴)함께 은둔하였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불렀다.
조선 건국(朝鮮建國)초기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금기하였다가,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어, 350여년이 지난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이로써 겨우 기록으로 남길수 있었고, 제사를 모실 수 있었다.
두문동인 72현 명단◈려조충렬록(麗朝忠烈錄) 古4653-15
蔡東說 편. 1923년. 1책(55장). 목활자본. 31. 5 × 19cm.
고려말 개경의 杜門洞 諸賢들의 사적을 모은 책. 두문동은 고려의 太學이 있던 곳이다. 序文에서는 고려말의 충신 72인과 새로 찾아낸 2인을 합하여 74인의 사적을 수록함을 밝혔으며, 다음에 目錄을 실었다. 이어서 규장각충렬록두문동제현선생실기(奎章閣忠烈錄杜門洞諸賢先生實記)에서는 고려말 입절사의자(立節死義者)로 평가된 72인과 추가된 2인의 명단과 간략한 사적을 적었다. 이들 74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다음에는 후대에 이들의 사적을 기리는 사업에 관련된 글들을 수록하였는데, 立碑의 전말이 적힌 杜門洞東峴舊碑陰記와 杜門洞請褒疏略, 개성유수의 狀啓 5편과 備局·禮曹의 문서, 英祖 辛未年(27년:1751)의 致祭 祭文, 후손을 敍用하라는 傳敎, 碑閣의 上樑文 등이 수록되었다.
부록으로는 고려말의 충신에 관한 몇 가지 글을 실었는데, 南公轍의 高麗名臣傳의 逸民傳 贊을 비롯하여 勝國名流標榜錄, 麗史補遺, 海東忠義錄, 不朝峴言志錄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표방록은 三仁, 三節, 十隱, 十義, 十l臣, 十烈, 九貞, 九逸民, 九忠, 八淸, 八高士, 八判, 九孝, 五宗英, 散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미에는 李倫求의 跋文이 있다.
◈高麗守節臣(고려수절신)
조선이 개국된 시기를 전후하여 유학(儒學)의 대의명분론을 내세워, 왕씨(王氏) 고려에 충성을 하고 새로 개국한 이씨(李氏)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은 학자.
이들은 고려 멸망 전 은둔생활을 하며, 이성계(李成桂)의 등극을 반대하다 살해되기도 하고, 조선 개국 후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두문동에 들어간 72명의 이름이 전하는데, 전부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은 아니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은 사람들도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 ·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